[직설] '여성 의석 할당제', 남성의 얼굴을 한 정치를 뒤집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입력 2021. 3. 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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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세계에서 여성 의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어딜까.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서유럽 혹은 스웨덴 같은 북유럽 국가들? 모두 오답이다. 정답은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르완다 공화국이다. 국제의회연맹에서 2020년 1월 191개국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르완다 하원 80석 중 49석(61.3%)을 여성이 점유하고 있다. 유일한 60%대다. 의원뿐만이 아니다. 2018년 구성된 26석의 내각 중 50%인 13석이 여성의 몫이다. 판검사, 시·도 의원 등의 영역에서도 여성 비중이 눈에 띄게 높다. 세계경제포럼이 2019년 153개국을 조사한 성 격차 지수 순위에서도 르완다는 9위에 올랐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르완다의 이러한 면모는 2003년 개헌 당시 헌법에 명문화한 여성 할당제 덕분이다. 르완다 헌법은 “모든 조직의 의사결정구조의 30% 이상을 여성으로 구성”하도록 못 박았다. ‘후보 할당’이 아니라 ‘의석 할당’이다. 그 결과 2003년 이전까지 20% 아래였던 여성 의원 비율은 2003년 48.8%를 시작으로 2008년 56%, 2013년 64%, 2018년 61.3%로 늘었다.

여성 할당제 도입 배경에는 1994년 집단학살이 있다. 소수민족인 투치족이 100만명 가까이 학살당했는데, 주로 남성들이 죽었다. 약 50만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강간당했다. 학살 이후에는 성비가 심각하게 무너져서, 당시 인구의 약 70%가 여성이었다고 한다. 가장이었던 남성들이 사라지자 여성들이 경제생활 전면에 나서야 했다. 전시 성폭력의 대상이었던 여성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반성과 사죄가 필요했고, 여성이 경제력을 갖게 됨에 따라 사회구조가 변동됐다. 그럼에도 중요한 정치 영역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배제됐다. 여성들은 이를 참아주지 않았다. 조직된 운동으로 개헌을 이끌어냈다.

르완다 사례가 흥미로운 점은 단지 의석 할당만이 아니다. 할당 비율은 30% 이상이지만 실제 여성 의원 비율은 그 두 배인 60%대라는 점, 그리고 2003년 이후 증가 추세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여성 할당제를 시행하는 여러 선진국에서 실제 결과는 대부분 할당 비율만 딱 맞춰 채우거나 모자란다는 점을 떠올리면 르완다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성들은 정치라는 장(場)에서 ‘여성은 정치에 맞지 않는다’는 식의 편견에 부딪혀 왔다. 여성 정치인의 실패가 곧 여성의 문제로 지적되는 일도 부지기수다. 이처럼 정치는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는데, 후보 비율만 할당하는 방식은 이 고착화된 상을 본질적으로 바꾸지는 못한 게 아닐까. 남성의 얼굴을 한 정치의 상을 그대로 둔다면 여성은 단지 기회를 보장받을 뿐 여전히 불리한 싸움에 임해야 한다.

르완다가 뒤집어버린 것은 바로 그 정치의 상이다. 강력한 할당제로 여성들을 밀어넣어 정치의 얼굴을 바꿔버렸다. 의회 내에서 주류를 이룰 만큼 규모가 커진 여성들은 정치라는 장을 탈남성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반동’ 없는 상승세를 이어나가고 있다. 물론 여성이 다수를 이룬다고 반드시 좋은 정치를 하는 것도 아니겠지만, 이 문제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정치가 좋아질 리는 더더욱 없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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