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돈으로 한강의 기적"..우리 법원 맞나

신민정 입력 2021. 6. 8. 00:36 수정 2021. 6. 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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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노역]강제노역 손배소 각하, 대법 판결과 배치
"일 기업 패소해 강제집행 땐
국제적 역효과 초래" 주장까지
민변 등 "비본질적·비법률적 판단"
피해자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한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1심에서 패소한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강제노역 피해자 고 임정규씨의 아들 임철호(왼쪽)씨와 일제강제노역피해자회 장덕환 사무총장, 강길 변호사가 판결이 내려진 뒤 법원을 나서면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7일 서울중앙지법 재판부가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한 것은 일제의 불법 행위에 책임을 못 묻는다는 내용뿐 아니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거슬렀다는 점에서도 주목받는다. 특히 일본 기업들에 강제집행이 이뤄지면 일본은 물론 미국과의 관계도 훼손될 수 있다며 매우 이례적인 ‘사법 외적’ 판단까지 밝혀, 법조계 일각에서 비상식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다른 비슷한 소송들처럼 이번에도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전범기업들의 책임이 해소됐느냐가 쟁점이 됐다. 재판부는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협정 문구를 근거로 개인 청구권도 사라졌다는 쪽에 섰다.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재판관 7 대 6 의견으로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결한 것과 완전히 배치된다. 당시 대법원은 일본제철이 한국인 피해자 4명에게 1억원씩 지급하라는 판결을 확정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이 사건 판단은)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 의견과 결론적으로 동일하다”며, 당시 개인 청구권도 소멸했다고 판단한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의 소수 의견을 따랐다. 나아가 전원합의체의 결론(다수 의견)에 대해 “국내 최고재판소 판결이지만,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이에 터잡은 징용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고 있어, 이러한 판결은 단지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 “일본을 포함한 어느 나라도 자신들의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했다는 자료가 없고, 국제법적으로도 그 불법성을 인정한 자료가 없다”고까지 했다. 대법원 판단을 폄하한 듯한 표현이다.

다른 강제동원 사건에서 피해자 쪽을 대리한 임재성 변호사는 “전원합의체 판결과 다른 하급심 판결이 있을 수는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등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이라며 “(이번 판단은) 전원합의체 소수 의견과 동일한 것으로, 법리가 앙상하다”고 했다.

게다가 재판부는 원고들이 이겨 강제집행까지 가면 심지어 대미 관계가 악화돼 안보가 불안해진다는, 사건 쟁점과 무관한 주장까지 판결문에 담았다. 재판부는 “청구를 인용하는 본안판결이 선고돼 확정되고 강제집행까지 마쳐질 경우 국제적으로 초래될 수 있는 역효과”가 있다며 “강제집행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상의 대원칙을 침해한다”고 밝혔다. 판결문은 “분단국의 현실과, 세계 4강의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대한민국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세력의 대표 국가들 중 하나인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이는 결국 한-미 동맹으로 우리 안보와 직결된 미합중국과의 관계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권리 침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지 따지는 사법 절차에서 쟁점과 상관없는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까지 끌어들여 판단 배경으로 제시한 것이다.

재판부는 또 ‘청구권협정으로 지급된 3억달러는 과소하므로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이 포함됐다고 볼 수 없다’는 원고들 주장에 “당시 낙후한 후진국 지위에 있던 대한민국과 이미 경제대국에 진입한 일본국 사이에 이뤄진 과거의 청구권협정을 현재의 잣대로 판단하는 오류”라고 반박했다. 이어 “당시 대한민국이 청구권협정으로 얻은 외화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가되는 세계 경제사에 기록되는 눈부신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며, 일본의 ‘기여’를 강조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15개 단체는 성명을 내어 “(재판부가) 비본질적·비법률적 근거를 들어 판결을 선고했다”며 “법관으로서의 독립과 양심을 저버린 판단을 했다. 민사소송 원고의 권리를 인정하면 ‘대한민국의 국가 안전보장, 질서유지 및 공공복리’가 위태로워진다는 금시초문의 법리를 설시하면서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논리를 별다른 부끄러움 없이 판결문에 명시했다”고 비판했다.

원고들은 항소 의사를 밝혔다. 장덕환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 정의구현 전국연합회’ 회장은 “재판 결과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며 “정말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라고 말했다.

한편 재판부가 선고기일을 갑자기 바꾼 것도 원고들의 비난을 샀다. 선고는 원래 10일로 잡혔으나 7일 오전 재판부가 갑자기 이날 오후로 변경해 혼란이 발생했다. 그래서 지방에 사는 피해자 다수는 법정에 오지 못했다고 한다. 재판부는 “법정의 평온과 안정을 고려해 기일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코로나19 상황에서 고령의 원고가 다수 모이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해명했다.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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