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의 책상물림]무고하십니까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입력 2021. 1. 2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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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무고한 무고자를 무고하게 무고했다.” 억지로 만들어 본 문장이지만, 어휘력이 뛰어난 분들은 대략의 의미를 짐작할 것이다. 우리말에는 수많은 동음이의어가 있으며 그 가운데 한자어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한자어를 가능한 한 덜 쓰고 순우리말로 바꾸어 쓸 수 있다면 바람직하겠지만, 명료한 의미를 살려 한자로 배우고 병기하는 것도 쓸모 있다. 어휘는 단순한 의미 전달 수단일 뿐 아니라 나름의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어서, 이를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고(無辜)의 고(辜)에서 발음기호를 뺀 신(辛)은 양쪽으로 날이 있고 끝이 뾰족하여 자르고 찌를 수 있는 형구(刑具)의 상형이다. 무고(無辜)는 코를 베거나 얼굴에 먹을 새겨 넣는 따위의 형벌을 받을 만한 죄가 없음을 강변하는 어휘다. 무고자(無告者)는 맹자가 홀아비, 과부, 독거노인, 고아를 가리켜서 이들은 ‘하소연할 곳도 없는 사람들’이니 국가가 보살펴야 한다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무고(無故)는 군자삼락의 “부모구존(父母俱存) 형제무고(兄弟無故)”에서처럼 탈이 없는 상태를 이르기도 하고, <예기>의 “임금은 무고하게 소를 죽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이유 없이 당하는 고난을 말할 때 많이 사용된다.

포털 검색에 한글로 ‘무고’를 쳤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어휘는 무고(誣告)다. 언(言)과 무(巫)를 합친 무(誣)는 거짓말을 뜻한다.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점차 벗어나면서 무당의 말을 신빙하지 않게 된 사회상을 반영하는 글자이다. <대명률>에 ‘무고’ 조가 따로 있을 만큼 엄중한 가중처벌을 적용했음에도, 조선시대 내내 크고 작은 무고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소·고발공화국이라고 불리는 오늘날 대한민국처럼 무고가 횡행하는 때가 있었을까. 고소·고발된 건 외에도 법으로 일일이 다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무고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에 넘쳐난다.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목적만으로 없는 말을 지어내고 유포하는 행위는 참으로 비열하고 악랄한 범죄다. 코로나19의 위협 가운데에도 작년 12월 고소·고발 건수가 11년 만의 월 최다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무고(誣告)가 유행하는 세상에서, 선량한 모든 이들의 무고(無故)를 빈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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