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키는 대로 해, 참아" 희생 강요, IT기업 '열린 문화' 말뿐

김창우.김나윤.윤혜인 2021. 6. 12.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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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직원 극단 선택 파문 확산
카카오·넥슨·포스코ICT '갑질' 논란
'조금만 참자' 벤처 분위기 안 변해
대기업 됐지만 강압적 지시 여전
상명하복 문화에 익숙한 기성세대
MZ세대의 수평적 문화와 충돌도
처벌 강화하고 제도적 보완 필요

‘꿈의 직장’ 갑질 실태
네이버노조가 지난 7일 네이버 본사 앞에서 직장 내 괴롭힘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동료에 대해 회사 측에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어차피 저 사람 변하지 않아. 문제 삼아봐야 너만 다칠 수 있어. 네가 참아.”

판교의 소규모 정보기술(IT) 업체에 근무하는 A(32)씨가 인사팀 동료와 상담하자 나온 반응이다. A씨는 “팀장이 퇴근 후와 주말에 단톡에서 폭언하고, 바로 응답하지 않으면 욕설을 퍼부었다”며 “회사에서도 휴지통을 걷어차고, 팔을 올려 때리려고 시늉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작은 회사라 노동청에 신고하면 바로 누군지 알려지고, 좁은 바닥이라 이직해도 꼬리가 따라다닌다. A씨는 “하루에도 서너번씩 울화통이 터져 확 들이받고 싶은 심정”이라고 덧붙였다.

올 초 스타트업 회사로 이직한 B씨는 오전 8시 출근해 점심시간도 없이 밤늦도록 일을 했고, 휴일에도 출근했다. 그러나 회사 대표는 직원들 앞에서 B씨에게 “생산성이 낮아서 야근한다”고 조롱하며 연봉을 40% 삭감했다. 두 달 만에 해고 당한 B씨는 우울증과 구토 증상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다.

“문제 삼아봐야 너만 다친다” 유야무야

기존 대기업과는 다른 수평적인 조직 문화와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자랑하던 스타트업과 IT 기업에서 ‘직장 갑질’ 사례가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 적지 않은 연봉과 복리후생으로 ‘꿈의 직장’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강압적인 업무지시와 압박, 초과근무 같은 직장 내 괴롭힘이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IT 기업인 네이버는 지난달 25일 상사의 ‘갑질’에 시달리던 한 직원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 도마 위에 올랐다. 고인은 “두 달짜리 업무를 매일 던져준다”고 지인들에게 하소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고인의 상사 S씨는 ‘엎드려뻗쳐’로 악명이 높았고, 평소에도 정강이나 뒤통수를 툭툭 건드리는 등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2019년 6월 15명의 팀장이 경영진 C씨에게 시정을 요청했다가 세 명이 보직 해임을 당했고 몇몇은 이직했다”는 등의 증언이 올라왔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문제가 불거진 것은 네이버뿐만 아니다. 카카오는 주 52시간 근무제 등 근로기준법을 다수 위반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부지방 고용노동청 성남지청 조사 결과 일부 직원에게 주 100시간 가까이 근무시키거나 임산부에게 시간외근무를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올해 초 카카오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블라인드에 직장 내 괴롭힘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극단적 선택을 암시하는 글을 올린 것을 계기로 조사한 결과다. 매주 금요일마다 조직개편을 발표해 임직원을 이리저리 배치하는 인력 운용도 도마 위에 올랐다. 넥슨 역시 게임 개발 프로젝트가 종료·중단돼 업무 재배치를 기다리는 직원 중 10여명에게 일방적으로 임금 4분의 1을 삭감하고, 3개월의 대기발령 조처를 내렸다. 고용노동부가 괴롭힘 예방 및 대응 우수 사례로 꼽은 포스코의 IT 분야 계열사인 포스코ICT에서는 6년간 선배의 괴롭힘에 시달려 산재 판정을 받은 직원 D씨에게 퇴직을 권고하고, 이에 불응하자 퇴직 연수원으로 발령을 내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해자는 경고 처분에 그쳤다. D씨는 2018년 상습적인 폭언 등을 참다못해 팀장에게 보고했지만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라. 회사에서 널 보호할 것 같냐”는 말만 들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성과를 위해 직원의 희생을 강요하는 수직적인 문화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박원우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구성원이 수십명 수준인 스타트업·벤처 시절에는 ‘힘들지만 발전을 위해 견디자’는 리더십이 통하지만, 대기업이 되면 구성원이 요구하는 보상이 당연히 달라지게 마련”이라며 “급격히 성장한 네이버·카카오 같은 IT 기업은 규모에 맞춰 조직 문화도 적절히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창업자와 경영진이 ‘우리는 이런 문화 때문에 성공했어’라고 고집하면 오히려 자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규창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신산업 분야 기업들은 최고경영진이 ‘우리는 굉장히 열린 문화’라고 말하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정작 명령하고, 밑에 있는 직원 의견을 들어주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게 문제”라고 말했다. 산업화를 이룩한 기성세대와 정보화 시대를 선도하는 젊은 세대 간의 문화적 충돌도 조직 내 갈등의 원인 중 하나다. 권위주의, 상명하복, 집단 문화에 익숙한 구세대와는 달리 개인주의가 강한 분위기에서 성장한 2030 MZ세대는 개성이 강하고 공정성을 중시한다. 실제로 한 대기업 임원 E씨는 “상사의 전화를 받으려고 잠자리에서도 휴대전화를 놓지 않다 보니 손자국이 남을 정도였다”며 “퇴근 시간 이후라고 메시지조차 확인하지 않는 직원들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대기업 직원 F(29)씨는 "업무가 끝났으면 퇴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위에서는 다른 사람이 야근하고 있는데 퇴근하는 건 의리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세대 간의 인식 차이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감수성의 차이로 이어진다. 기성세대가 당연하게 여기는 다소 고압적인 지시나 휴일 업무 전화 등이 MZ세대에게는 과도한 압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규창 교수는 “세대 간 문화적 배경이 다르니 서로 이해하기 어렵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한 최고 경영자의 의지”라고 지적했다.

“최고 경영자의 변화 의지가 가장 중요”

직장 갑질을 막을 수 있는 법적 제도적 보완도 필요하다. 위디스크 소유주였던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직원 폭행 사건이 불거진 것을 계기로 2019년 7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으로 불리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마련됐다. 직장에서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피해자가 신고할 경우 사용자는 바로 조사해 적절한 조처를 해야 하며, 이를 위반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는 것이 골자다. 노무법인 신용의 김광훈 노무사는 “괴롭힌 행위 자체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어 가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처벌이 어렵고, 근로기준법 적용에서 제외되는 5인 미만 사업장이나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 등 특수고용 근로자는 법적인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점이 문제”라며 “처벌 제도 및 적용 대상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받아도 피해 보상을 받기는 어렵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2016~2018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산재를 인정받은 사례는 131건 뿐이다.

법무법인 YK의 강상용 변호사는 “특히 근로자가 정신질환으로 자살할 경우 불인정 받을 확률이 크다”며 “근로자의 권리를 구제하기 위해서라도 심사 기준을 개편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의 최혜영 노무사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지 벌써 2년이 가까워 오지만 관련 법안이 있는지도 모르는 직장인도 많다”며 “단순히 법 제정했다고 끝이 아니라 예방 교육, 피해자 보호, 정당한 사건 처리 등 직장 문화를 개선하는데 다각도로 노력하는 게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 “직장 내 괴롭힘 신고해도 ‘보복갑질’ 당하는 악순환 끊어야”

박점규
“스타트업 기업의 직장 내 괴롭힘 사례를 보면 대표가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 자신이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고, 능력이나 노력이 부족하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직원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연봉을 깎고, 쫓아낸다.”

박점규(사진)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직장 내 괴롭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신고하면 신속히 조사해 엄중하게 처벌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Q : 스타트업 제보 사례의 공통적인 문제점은.
A : “회사 대표가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 ‘스타트업이라서 근로기준법을 위반해도 된다’는 무식한 대표도 있고, 직원들을 학생 대하듯 무시하는 사장도 있다.”


Q : 피해자 보호 조치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
A :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해도 열명 중 일곱명은 인정받지 못했다. 신고를 이유로 불리한 처우를 경험했다는 응답도 67.9%로 나타났다. 신고자들은 징계, 업무 배제, 부서 이동, 따돌림, 해고 등 ‘보복갑질’을 당한다. 교묘하게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경우 증거 확보도 어렵다. 결국 보복갑질에 지친 노동자들이 신경 정신과 약으로 버티다가 그만두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신고를 해봤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도리어 보복을 당하게 되니 이를 두려워해 입을 다무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Q : 재발을 막을 대책은 무엇인가.
A : “사건을 신고했을 때 노동청과 검찰이 신속히 조사해 법에 따라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 특히 보복갑질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을 경범죄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직장 내 괴롭힘도, 이로 인한 자살로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Q : 기성세대와 2030세대 사이에 기업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차가 있는 것 같다.
A : “작년 6월 직장인 1000명에게 설문 조사한 결과 50대의 63.4%, 상위 관리자의 75.9%가 ‘괴롭힘이 줄었다’고 응답했다. 반면 피해자가 많은 2030은 절반 이상이 ‘줄지 않았다’는 반응이었다. 경영진과 관리층부터 ‘예전에는 말이야’하는 태도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윤혜인 인턴기자 yun.hyein@joongang.co.kr



김창우·김나윤 기자, 윤혜인 인턴기자 changwoo.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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