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우의 시선] 문파에 포획 당한 대통령

최민우 입력 2021. 1. 18. 00:21 수정 2021. 1. 18. 06:2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 사면, 신년회견 화두
문파 반발에 여권 눈치보기 바빠
1년 남은 대통령이 매듭 풀어야
최민우 정치에디터

문재인 대통령이 오늘(18일) 신년 기자회견을 한다. 내년은 대선(3월 9일)을 코앞에 둔 터라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신년 회견이다. 코로나 재확산 및 경기부양책, 백신, 부동산, 북 전술핵 등 몇 가지 쟁점이 있겠으나 그간 문 대통령 발언을 봤을 때 솔직히 큰 기대는 없다. 궁금한 건 하나,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에 대한 첫 육성 입장이다.

예상 답변은 있다. 첫째는 ‘대법원 판결 나자마자 사면 논의는 시기상조’다. 여태 여권은 “최종 선고도 나기 전에 무슨 사면 운운이냐, 그런 게 특혜”라는 논리로 눙쳐왔다. 근데 이제는 형이 확정된 지 얼마 안 됐다고 또 미룬다? 그렇게 질질 끄는 사이 박 전 대통령은 4년 가까이 옥살이(전직 대통령 중 최장 수감)를 했고, 전직 대통령 두 명이 한꺼번에 감옥에 갇히는, 실로 근대 국가에선 전례를 찾기 힘든 상황이 지속됐다. 아무리 정치보복이 아니라 한들, 이를 방치하는 건 국가적 불행이다.

둘째는 ‘국민적 공감대와 당사자의 반성·사과 있어야’다. 국민적 공감대야 뻔한 레토릭이니 논외로 쳐도, 당사자 반성·사과라는 ‘조건부 사면’은 ‘조건부 출마’만큼이나 궁색하다. 사실 대통령 사면권은 군주의 은덕을 연상케 해 행정·입법·사법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민주주의 3권 분립에는 역행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최고 권력자의 사면권을 용인하는 이유는 국가 통합이다. 차가운 법의 빈틈을 보듬자는 취지다. 그런데 무릎 꿇어야 풀어준다? 그건 통합이 아니라 굴복하란 얘기다.

사실 잠잠하던 사면론에 불을 댕긴 건 올초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다. 집권여당 대표가 대통령 고유 권한을 청와대와 교감 없이 일방적으로 툭 던졌을 리는 만무하다. 돌이켜보면 지난해말 ‘추-윤 갈등’이 일단락될 즈음부터 여권 기류는 바뀌었다.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교체됐고, 새로 지명된 박범계 의원은 “법무부와 검찰의 안정적 협조관계가 문 대통령 주문”이라고 전했다. 소통에 능하다는 유영민 전 과기부 장관이 대통령비서실장에 기용됐으며, 여야 영수회담 얘기가 흘러나왔고, 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부동산 문제를 두고 “매우 송구한 마음”이라고 했다. 강성에서 온건으로 노선 변화가 확연했다. 그 정점에 있었던 게 ‘MB·박근혜 사면’이었다. 짧게는 4월 재보궐선거, 길게는 문 대통령 임기 이후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하지만 야심찬 사면 카드를 내동댕이친 건 전직 대통령도, 야당도 아닌 바로 ‘문파’였다.

문파의 극렬함은 이미 야권을 넘어 여권까지 쥐락펴락하고 있다. 박용진 의원은 지난해 11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이 있었다”고 했다가 “정의당에서 온 쓰레기”라는 소리를 들었다. 추 전 장관에게 “정도껏 하세요 좀!”이라고 했던 정성호 예결위원장은 “역시나 이재명 끄나풀”로 낙인찍혔다. 여야 합의 처리를 말한 국회의장은 ‘사쿠라(어용)’라며 ‘후원금 18원’을 받았고, 추경에 반대한 여성 의원은 ‘X덩어리’로 불렸다.

최근엔 문파가 ‘검찰 수사권 폐지’ 연판장을 돌려 민주당 황운하·김용민·김남국·장경태·이수진 의원 등이 실제 서약서를 내는 일까지 벌어졌다. 단순한 막말, 조리돌림을 넘어 국가 정책 기조에도 관여하겠다는 태세다. 급기야 대통령을 대신해 총대 메고 사면론을 꺼낸 이낙연 대표를 겨냥해 “탄핵해야한다”고 공격했다. “민주당이 문파에 잡아먹혔다” “여권 권력서열 1위는 문파” 등은 이제 허언(虛言)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같은 풍경이 문 대통령으로선 당혹스러울지 모르겠다. 문파가 누구인가. 이 정권 창출의 1등 공신이자, 지난 4년 ‘문프’를 향한 공세가 있을 때마다 악역을 자처했던 이들 아닌가. 그런 문파가 슬슬 반기를 들다니. 하지만 작가도 “글을 쓰는 건 내가 아니라 글 자체”(롤랑 바르트 ‘작가의 죽음’)라고 토로한다. “조직은 만들어지는 순간, 그 조직 내부 논리로 굴러간다”는 게 관료주의다. 문파도 처음엔 문 대통령에 종속적 관계였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의 메커니즘을 구축했다는 얘기다. 이제 임기 1년의 문 대통령과 더 강한 권력을 원하는 문파의 이해관계는 꼭 일치할 수는 없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지지층이 이탈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면서 문 대통령은 반면교사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원하든, 원치 않든 이제 문 대통령은 지지층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라는 현실과 맞닥뜨리고 있다. 하여 오늘 기자회견의 본질은 두 대통령을 풀어줄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문파에게 끌려갈 것인가, 문파를 끌고 갈 것인가에 답할 때다.

최민우 정치에디터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