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의 김지영'이 쏘아 올린 페미니즘

이영경·김유진 기자 입력 2018. 11. 27. 21:24 수정 2018. 11. 27.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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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조남주 소설 ‘82년생 김지영’
ㆍ출간 2년여 만에 100만부 돌파
ㆍ젠더 의제 떠받친 ‘시대 아이콘’

경력단절된 서른네 살 전업주부 김지영씨의 이야기에 100만명이 공감했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사진>이 누적 판매부수 100만부를 돌파했다. 민음사는 2016년 10월 출간된 이 소설이 2년여 만에 100만부를 넘어섰다고 27일 밝혔다.

최근 한국 소설 주요작 가운데 2007년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2009년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 이후 9년 만에 <82년생 김지영>이 100만부를 돌파했다. 민음사는 “그동안 침체됐던 문학 출판계에 <82년생 김지영>이 새로운 분기점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82년생 김지영>의 100만부 돌파는 2016년 이후 한국 사회를 뒤흔든 페미니즘 열풍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이 차별과 폭력에 눈뜨기 시작했고, 그해 출간된 소설은 굵직굵직한 젠더 이슈와 함께 호흡하며 주목을 받았다. 젠더 이슈가 중요한 정치적 의제가 되면서 금태섭 의원, 고 노회찬 의원 등 정치인들이 <82년생 김지영>을 추천했고, 미투 운동의 문을 연 서지현 검사는 성추행 피해를 폭로하면서 <82년생 김지영>을 언급했다. 가수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는다는 이유로, 배우 정유미씨가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는 이유로 비난과 ‘악플’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82년생 김지영>은 하나의 텍스트를 넘어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문화적 징표가 됐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씨는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 대중화 시점에 출간됐고, 페미니즘 대중화에 불붙이는 계기가 된 소설”이라며 “한 명의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들의 공통적 경험을 짚어냈다”고 말했다.

베스트셀러는 시대와 사회를 반영한다. <대한민국 독서사>를 펴낸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는 “책이 사회적 분위기, 논란 등 책 외부에 있는 힘과 접촉하면서 ‘티핑 포인트’(극적인 변화가 이뤄지는 시점)가 만들어지고, 베스트셀러가 된다”고 말했다. 밀리언셀러에 오른 한국 소설의 흐름을 보면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밀리언셀러가 남성 서사를 다룬 <칼의 노래>에서 모성애를 강조한 <엄마를 부탁해>로,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된 <82년생 김지영>으로 변화하는 동안 한국 사회도 적잖은 변화를 겪었다.

■ 학교·직장·가정에서의 성차별…김지영은 ‘나’였다

공감 얻은 ‘설득의 문학’

김지영의 고민, 나의 고민 27일 누적 판매부수 100만부를 돌파한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있는 한국 소설 베스트셀러 진열대 맨 앞에 놓여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82년생 김지영>의 사회학

2001년 출간돼 6년 만에 100만부를 돌파한 작가 김훈의 <칼의 노래>의 인기 배경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정국이 있었다. 김탁환 작가가 <불멸의 이순신>을 내고, 동명의 TV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이순신 열풍’이 불던 때였고,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탄핵으로 직무정지를 당한 당시 <칼의 노래>를 읽고 있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오혜진 문화연구자는 “소박한 정치적 자원을 가졌지만 ‘진정성’ 하나로 정치적 난관을 돌파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이미지가 김훈이 그린 이순신 이미지와 겹쳐졌다”고 분석했다.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는 2008년 출간돼 10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100만부를 돌파하며 ‘엄마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미 상당한 독자를 확보한 ‘스타 작가’였던 신경숙의 힘도 있었지만,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모성을, 작가 특유의 마음을 파고드는 문장으로 그려내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이 작품을 두고 ‘모성의 재발견’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에선 모성신화나 가족주의를 강조한 신파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오 연구자는 “<엄마를 부탁해>가 모성이나 가족 같은 전통적 가치를 재소환하고 대중적 호응을 얻은 것은 보수정권 집권과 맞닿아 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고 말했다.

모성신화에 대해 문제 제기 여성문제에 공감 이끌어내 2016년 이후 페미니즘 열풍 젊은 여성들, 독서 통해 연대

2018년 <82년생 김지영>에 이르러 모성신화는 해체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병명은 산후우울증과 육아우울증이다. 소설은 “왜 어머니는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을까”라며 모성애를 당연시하는 사회에 의문을 제기한다. 신샛별 문학평론가는 “희생하는 어머니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여성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을 착취하기 위해서 지속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82년생 김지영>은 평범한 1980년대생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차별을 각종 통계와 실제 벌어진 사건을 통해 보여준다. 학교와 직장, 고용시장에서 받는 성차별과 불평등부터 ‘독박육아’를 둘러싼 문제점 등을 사회구조적 모순과 연결시켜 보여준다.

세 소설의 독자층도 차이가 난다. 교보문고가 분석한 독자데이터를 보면 남성 서사인 <칼의 노래> 독자는 50.97%가 남자였지만, <82년생 김지영>의 경우 남성은 23.85%에 그쳤다. <엄마를 부탁해>의 남성 독자는 32.47%였다. 소설의 주 독자층이 20~30대 여성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82년생 김지영>은 20~30대 여성 독자층이 56.32%로 가장 많은 독자층을 형성했다.

■ 무엇이 100만부를 만들었나

세대·계층 등 따라 다른 의미 한국사회에 던진 화두 진행형

<82년생 김지영>의 장점은 보편적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여성 문제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데 있다. 1982년에 태어난 여성 가운데 가장 많은 이름인 김지영의 삶에서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고 공감하는 독자들이 많았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82년생 김지영>은 설득의 문학을 보여줬다”며 “대중의 눈높이에서 여성들의 삶이 어떤가를 쉽게 설득할 수 있는 언어로 쓰였다”고 말했다.

‘김지영’이 입을 열자, 다른 여성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됐다. 서지현 검사가 성추행을 폭로하며 <82년생 김지영>을 본떠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 상징적이다.

<82년생 김지영>의 작품해제를 쓰기도 한 김고연주 여성학자는 “소설 속 어디에도 김지영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없는데, 그래서 누구나 그 안에 자신을 그려넣을 수 있다. 그게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가 된 이유”라고 말했다.

2016년 이후 페미니즘 열풍이 불면서 새로운 독자의 등장도 ‘김지영 열풍’의 원인이 됐다. 10~20대 젊은 여성 독자들이 페미니즘 실천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독서에 나서는 것으로 분석된다. 책이나 강연을 함께 들으며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다. 허윤 문학평론가는 “여성들은 책읽기를 통해 연대하는 독자가 됐다”며 “2018년 한국 문학은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자각하고 젠더를 근본적 문제로 삼는 독자 집단과 만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 김지영이 남긴 숙제

희생적인 여성의 좌절 구도 못 벗어났다는 일부 지적도

<82년생 김지영>은 보편성을 바탕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남성들도 ‘페미니즘 입문서’로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기업 세미나에서 이 소설을 읽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김지영이 그리는 ‘보편적 여성’ 모습의 한계를 지적하는 평가도 있다. 허윤 평론가는 “ ‘김지영’이 성공한 데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서사가 큰 힘을 발휘했지만, 희생적인 여성과 좌절이라는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평했다.

하지만 <82년생 김지영>은 그 보편성으로 인해 광범위한 수용자를 흡수하고 있다.

오혜진 연구자는 “금태섭, 노회찬 등 남성 정치인이 읽으면 ‘개념 정치인’으로 만드는 훈장이 되고, 서지현 검사가 읽으면 ‘미투의 선구자이자 용감한 엘리트 여성’의 서사에 배치된다. 반면 ‘소비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아이린과 같은 여성 아이돌이 읽으면 비난과 낙인의 근거가 된다”면서 “<82년생 김지영>이 서로 다른 세대와 계층, 성별의 독자로부터 각기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기호이며, 광범위한 수용의 층위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김지영’이 한국 사회에 던진 화두는 현재진행형이다.

■ “묻고 싶었다, 상식적 사람들의 세상인데 왜 괴로운지”

100만부 기념 특별판서 조남주 작가가 밝힌 집필 배경

누적 판매 100만부를 돌파한 <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 채널예스 제공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단절이 된 ‘82년생 김지영씨’는 조남주 작가(40)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10년 동안 <PD수첩> 등 간판 시사프로그램 메인작가로 일하던 그는 육아 문제로 계획에 없던 전업주부가 됐다. “글을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던 시간, 작가는 아이가 낮잠을 자거나 어린이집에 간 시간을 쪼개 글을 쓰면서 견뎌냈다.

조 작가는 100만부를 기념해 출간된 ‘코멘터리 에디션’에 실린 작가 인터뷰에서 집필 배경과 작품이 갖는 의미 등을 털어놨다. <82년생 김지영>은 일반적인 소설과는 다르게 서사를 전개하면서 통계 자료나 기사를 버무린 형식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평균적인 결혼과 출산 시기, 출산과 육아에 따른 경력단절 실태 등에 관한 자료를 찾아 김지영씨의 모습을 구체화했다”며 “여성들의 보편적인 고민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김지영이 여아 낙태가 가장 심했던 시기인 1980년대에 태어나 진로를 정하는 청소년기에 IMF 외환위기 사태를 겪고, 4년제 대학을 나와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꾸려가도록 한 것 등은 여성 보편의 경험을 전하기 위한 장치였다.

소설은 김지영씨가 학교와 직장, 사회에서 여성이자 엄마라는 이유로 겪는 온갖 차별과 불평등을 전면에 그리고 있지만, 남편이나 시댁 등 특정인과의 갈등을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조 작가는 “사회 분위기, 구조, 관습들이 개인을 고통스럽게 한다고 생각한다”며 “상식적이고 평범한 사람들만 있는데 왜 괴롭지? 그럼 문제가 어디에 있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을 포기하고 닫혀 있는 문 앞에 서 있는 전업주부의 고민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며 “전업주부에게도 이후의 삶이 있고 고민이 있다는 이야기를 비중 있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 2년간 한국 사회에서 크고 작은 젠더 이슈가 부상할 때마다 <82년생 김지영>이 꾸준히 거론됐다. 지자체 정책 홍보문구에 ‘○○년생을 위한 정책’이 등장했고, ‘82년생 김지영 법안’도 국회에 제출됐다. 조 작가는 “(제도들이) 수확될 때 다시 언급되고, 다시 읽히고, 또 새롭게 해석되고 그렇게 세상과 함께 성장하는 책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 소설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게 만들었다는 점을 의미 있게 생각한다”며 “책이 세상을 바꾸진 못하지만 내가 쓴 책이 누군가의 생각, 행동에 작은 변화라도 불러온다면 쓰는 나도 더 신중하고 깊어져야겠구나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조 작가가 2015년 12월 출판사에 e메일로 소설 원고를 투고했을 당시의 제목은 ‘820401 김지영’이었다. 이후 편집자의 제안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박혜진 민음사 차장(문학평론가)은 “여성 문제가 오랫동안 존재해 왔지만 경력단절 등의 문제는 80년대생 여성만이 가진 어려운 지점이라고 생각해 그 부분을 강조하고 싶었다”며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여성 문제들이 하나의 이야기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책을 통해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영경·김유진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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