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전용기로 귀환하고.. 농부가 발견해 돌아오고.. '어보의 귀향'
조선, 대한제국은 412점의 어보와 국새를 제작했고, 그것의 가치와 상징하는 바가 컸던 만큼 엄격하게 관리했다. 그러나 긴 세월을 겪으며 뜻밖의 재난이나 전쟁, 불법 행위 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명종실록’에는 1553년 경복궁에 큰 화재가 나 강녕전과 사정전 등이 불타고, 궁궐에서 보관하던 진귀한 물건과 서적 및 어보가 유실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1590년에는 어보를 보관하던 종묘에 도난, 방화사건이 있었다. 어보 등을 훔친 뒤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도적들이 일부러 불을 지른 사건이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거치며 큰 피해를 보았음은 물론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의외로 어보 유출이 적었다. 오히려 종묘의 각 실마다 보관되어 있는 어보의 현황을 파악해 관리에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국새는 일본으로 가져가 궁내청에서 보관했고, 미군정청이 광복 1주년을 기념해 ‘제고지보’ ‘칙명지보’ ‘대원수보’를 1946년 반환하고서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제의 이런 태도는 어보, 국새의 용도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의례용인 어보를 섣불리 건드렸다간 민족 감정을 자극할 수 있음을 우려했지만 실무용인 국새는 국권을 빼앗은 만큼 빼돌린 것으로 보인다.
제자리를 벗어난 문화재의 귀향은 극적인 스토리와 함께할 때가 많다. 어보, 국새의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어보, 국새는 성격상 왕실 유물에 특화된 국립고궁박물관이 대부분을 소장하고 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도 7점이 있다. 이 중 고종, 순종, 명성황후의 어보는 고 조창수 선생이 기증한 것으로, 해외 우리문화재 환수의 모범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문정왕후의 어보는 모두 4점이 제작되었는데 이 중엔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환수된 것 말고도 조선시대에 병자호란(1636∼1637년) 후 밭에서 뒹굴다 농부가 발견해 궁궐로 돌아온 것도 있어 흥미롭다. 청나라의 침입에 강화도로 조정이 피란 갈 당시 어보도 함께 옮겨졌다. 전쟁이 끝나고 조정이 한양으로 돌아올 때 어보도 다시 옮겨 왔으나 극심한 혼란의 뒤끝인지라 일부가 유실되었던 모양이다. ‘인조실록’ 1638년 3월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강화의 백성이 성 안에서 밭을 갈다가 금인(金印)을 얻어 바쳤는데, 바로 문정왕후의 어보였다. 중종(문정왕후의 남편)의 (종묘) 재실(齋室)에 간직해 두고, 이어 미포(米布)로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이 발간한 ‘조선왕실과 대한제국 황실 어보’는 “2017년 환수된 문정왕후 어보는 1547년 ‘성렬대왕대비’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제작한 것”이라며 “인조실록에 언급된 것은 같은 해 제작한 ‘인명’(仁明) 존호보로 보인다. 1842년 편찬된 ‘종묘의궤’에 ‘양 모퉁이가 결실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땅에 묻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고 소개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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