려당전쟁 현장중계 6 - 안시성 공방전의 수수께끼

임기환 입력 2020. 4. 3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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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95] 645년 려당전쟁의 최후 승부처가 된 안시성 전투는 워낙 유명해서 따로 부언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그 유명세 만큼 안시성 전투의 전개 상황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전하는 기록 자체가 워낙 빈약하기 때문이다.

전회에서 살펴본 주필산 전투는 겨우 이틀 동안의 전투임에도 당군과 고구려군 움직임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두 달 넘게 계속된 안시성 공방전의 전개 상황은 안시성 밖의 토산 축조와 이를 둘러싼 전투 기사를 제외한다면 몇 줄 정도에 불과하다.

더욱 주필산 전투를 총지휘한 당태종은 안시성 전투에서는 한발 뒤로 물러나 있는 듯한 인상이다. 다만 안시성 내에서 돼지와 닭 잡는 소리를 듣고 당 태종이 그날 고구려군의 야간 기습을 예측하는 혜안을 발휘하는 장면은 역시 빼놓지 않는다. 어쨌든 기록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안시성 전투 과정에서 당 태종의 존재를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간취된다.

다음 기록도 이런 분위기를 보여준다. 앞서도 소개한 바 있는데, 백암성의 항복을 받은 후 당 태종과 이세적이 다음 공격 대상을 의논하는 장면이 사서에 나온다. 이때 당 태종은 "공격하지 않아야 할 성도 있다"는 병법을 인용하면서 안시성이 공격하기 어려우니 건안성부터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세적은 보급로의 문제 등을 들어 안시성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공을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계책을 쓰지 않겠는가? 나의 일을 그르치지 말라"고 하면서 이세적의 의견에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들은 안시성 공격의 실패는 전적으로 이세적을 비롯한 당군 지휘부의 잘못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당 태종을 안시성 전투의 패배로부터 멀찍이 떼어놓으려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안시성 전투에 자체에 대한 기술이 너무 소략하여, 두 달여에 걸친 공격의 경과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일단 최대한 관련 기록을 찾아 안시성 전투의 과정을 복원해 보자.

6월 20일에 당 태종이 거느린 대군이 안시성 외곽에 주둔하였고, 21일에 고연수 등이 거느린 고구려군이 진격해 오고, 22일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대패하고 고연수 등은 당 태종에게 항복하였음은 이미 언급하였다.

그리고 7월 5일에 당 태종은 안시성 동쪽 고개로 군영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안시성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주필산 전투 이후 곧이어 안시성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별 성과가 없자 당 태종이 독려하기 위하여 안시성 가까이로 군영을 옮긴 상황인지는 확실치 않다. 만약 주필산 전투 이후 안시성 공격이 시작되었다면, 이미 10일 이상 공방전이 계속된 것이다.

어쨌든 7월 5일에 당 태종의 군영을 안시성 동쪽으로 옮기면서 공격이 본격화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중국 사서에는 안시성 공격에서 이적은 안시성의 서쪽을 공격하고, 이도종은 안시성 동남쪽에서 전투를 벌이며 공격용 토산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당군은 언제부터 토산을 쌓기 시작하였을까?

이 토산을 쌓는 데 60일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토산이 완공되었을 무렵 토산이 안시성벽 쪽으로 무너지면서 고구려군이 재빨리 토산을 점령하고 벽을 깎고 참호를 파서 지켰다. 이에 당군이 토산을 빼앗기 위해 3일간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9월 18일에 회군하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서 9월 18일 회군 시점에서 최소한 63일 전에 토산 축조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대략 7월 15일 이전이 된다.

주필산 전투 직후부터 공성전이 전개되었다면 20여 일쯤 뒤에 7월 5일 당 태종이 안시성 동쪽으로 군영을 옮기고 안시성 공격이 본격화된 지 10일이 채 안 되어 토산 축조를 시작한 셈이다. 왜 이 시점을 따져 보냐 하면 토산 축조는 당시 당군의 전략에서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안시성으로 비정되는 중국 요령성 해성시 영성자산성 : 사진 오른쪽 포곡의 산세가 산성이다. /사진=필자
구체적인 시점이 명기되지 않고 7월 중에 있었다고 하는 당군 지휘부의 작전회의 장면이 사서에 전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당 태종에게 항복한 고연수, 고혜진이 하나의 방책을 건의하였는데, 안시성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니 오골성(烏骨城)으로 진격하면 오골성 욕살이 나이가 들어 제대로 방어하지 못할 것이고, 그 뒤에는 평양 공격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군신들도 고연수의 군대가 격파되어 고구려군 전력이 취약해졌으니, 비사성에 있는 장량의 군대까지 불러들여 오골성으로 진격하고 압록수를 건너 평양을 공격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대해 장손무기가 "천자가 친정하고 있기 때문에 만전을 기해 진군해야 하는데, 건안성과 신성의 고구려 군사 10만이 오골성으로 진격하는 당군 뒤를 공격하면 위험하기 때문에 안시성과 건안성을 취한 뒤에 진군해야 한다"며 반대하였다. 이에 안시성 공격이 다시 계속된 것이다.

사실 안시성을 내버려두고 적의 영역으로 깊숙이 진격하는 것은 일종의 군사적 모험이다. 진격하여 승리를 계속 거두면 최선의 방책이 될 수도 있지만, 만약 고구려군의 방어망에 가로막혀 퇴군해야 할 상황이 될 때 안전한 퇴로를 확보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당시 당군은 요동성과 백암성을 확보하였으니 여기서 오골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하나만을 확보한 셈이다.

즉 오골성 공격에 실패하거나 혹은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강 너머까지 진공하다가 퇴군해야 할 경우, 하나뿐인 요동성-오골성으로 이어지는 퇴군로를 신성과 국내성의 고구려군에게 차단당하면 그야말로 당의 대군이 독 안에 갇힌 꼴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고연수의 건의가 반드시 당군에 이로운 방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찌 보면 고연수가 자신의 수치스러운 항복을 보상하려는 의도된 책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군으로서는 최소한 안시성에서 오골성으로 이어지는 퇴군로를 하나 더 확보해야 안심하고 진군할 수 있다. 혹 당 태종이 동행하지 않았다면 군사적 모험을 감행해볼 수도 있겠지만, 당 태종이 함께 진군하는 상황에서는 장손무기의 말대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당군이 안시성 공격에 매달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작전회의에서 안시성 공격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확정한 뒤에야 토산을 구축하는 공격 전술을 채택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토산 축조가 시작된 7월 중순 이전에 위 작전회의가 열렸을 것이다. 필자는 당 태종이 안시성 동쪽 고개로 군영을 옮긴 7월 5일 직후가 아닐까 추정한다. 어쨌든 안시성 공격이 더 이상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이 때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작전 회의가 열렸던 것이고, 이 자리에서 최종적으로 안시성과 건안성 공함 이후 진군한다는 기존의 전략이 재확인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토산의 축조라는 새로운 공성 전술이 채택된 점은 이때 당군 전략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토산 축조는 장시간이 걸리는 공격 전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세적은 계속해서 안시성 성문쪽을 계속 공격하였고, 이도종이 동남쪽을 공격하면서 토산을 축조하였으니, 당군이 전적으로 토산 축조에 매달린 것은 아니다. 이는 일종의 보조 전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도 이세적의 성문 공격이 아무런 성과가 없자, 토산 축조에 승부를 걸었던 듯하다. 중국 사서에 8월 10일에 당 태종이 군영을 안시성 남쪽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당 태종이 직접 나서서 전황을 독려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토산 축조가 시작된 지 한 달여가 지난 시점이니 아마도 이 무렵부터 토산 축조에 더 많은 공력을 투입하였을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늦어도 이때부터 당 태종이나 당군 지휘부는 고구려 원정의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산 축조에는 상당한 시일을 걸리는데, 8월 초순 시점에서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한다고 하더라도 9월 중순에야 토산이 완공된다는 점을 당군 지휘부가 몰랐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8월 시점에는 토산을 완공하여 안시성을 함락시킨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9월 중순이 넘어갈 것임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다시 건안성까지 공격하여 함락시킨다면 10월이 훌쩍 넘어갈 수 있다는 점도 충분히 계산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9월 18일에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철군 명령을 내린 이유가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풀은 마르며 물은 얼어서 군사와 말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는 사정 때문인 것처럼, 10월이면 요동에서의 군사 작전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즉 당군이 안시성과 건안성을 함락시켰다고 하더라도, 10월이 되면 더 이상 대군을 이끌고 오골성이나 압록강으로 진군하기 곤란하다는 점을 당 태종 이하 당군의 지휘부는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시성 공격을 위해 토산 축조라는 공격 전술에 승부를 건 늦어도 8월 시점에는 평양성은커녕 압록강이나 오골성을 공격하겠다는 뜻을 어느 정도 접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고구려 영역 깊숙이 진공하려는 뜻이 없음에도 안시성 공격에 장기전의 승부를 건 이유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필자는 당시 당 태종은 평양성 진공은 포기하고, 이듬해에 다시 고구려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추정한다. 이듬해 원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이미 확보한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비사성에다 안시성과 건안성을 추가로 확보하면 적어도 요하를 건너 북쪽의 개모성에서 남쪽의 비사성에 이르는 고구려의 최전방 방어체계를 붕괴시킨 결과가 되고, 오히려 이 지역을 고구려 공격을 위한 당의 전진 기지로 삼겠다는 새로운 전략을 구상한 것으로 추정한다.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오직 정황에 의한 추론일 뿐이다. 이런 추정이 혹 타당성이 있다면 안시성 전투의 승리는 단지 645년 전쟁의 승리에 그치지 않는다. 이듬해 원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당의 새로운 전략마저 무너뜨리는 승리인 셈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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