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실리콘 전략을 알아도 따라하기 어려운 이유 [최원석의 디코드]

최원석 국제경제전문기자 입력 2021. 10. 21. 13:57 수정 2021. 10. 23.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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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코드(decode): 부호화된 데이터를 알기 쉽도록 풀어내는 것. 흩어져 있는 뉴스를 모아 세상 흐름의 안쪽을 연결해 봅니다.

제품 전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탁월하지만 원리를 알면 남들도 쉽게 베낄 수 있는 전략, 그리고 어떻게 하겠다는건지 눈에 보이는데도 베끼기 어려운 전략입니다.

전자(前者)를 만들어놓고 남들이 베낀다고 탓해봐야 소용 없습니다. 전략의 수준이 그것 밖에 안되는 것이니까요.

진짜 뛰어난 전략은 남들이 내가 하는 일과 앞으로 하려는 일을 다 알게 됐는데도, 따라오기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구상해 놓은 무대, 내가 오랫동안 준비해서 가장 잘 아는 무대로, 경쟁자들이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올 수 밖에 없도록 하는 전략이겠죠.

이런 전략을 남들이 따라하는게 어려운 이유는 그 전략을 모두가 알게 되기 ‘훨씬 이전의 단계’에서 아주 ‘장기적인 사고(思考)와 계획’을 했기 때문입니다.

애플은 미국 시각으로 지난 18일 자사의 고성능 노트북 ‘맥북 프로’ 신모델을 발표했다. 이 모델에는 자체 개발 프로세서 ‘M1 프로’와 ‘M1 맥스’가 탑재됐다. 기존 프로세서 M1에 비해 성능이 크게 향상됐으나 그만큼 프로세서 크기도 커졌다. /애플 동영상 캡처

◇애플, 신형 프로세서 ‘M1 프로’와 ‘M1 맥스’ 탑재된 맥북 프로 선보여

애플이 미국 시각으로 지난 18일 발표한 자사의 고성능 노트북인 ‘맥북 프로’ 신모델을 보고, 새삼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됐습니다.

신형 맥북 프로에는 ‘M1 프로’와 (M1 프로의 고성능 버전인) ‘M1 맥스’라는 2가지 신형 프로세서가 탑재됐는데요. 전력은 덜 쓰면서도 성능은 크게 높였습니다. 신제품 나올 때마다 늘상 하는 얘기 아니냐고 하실 수 있지만, 기대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발표에서 애플 관계자들은 “도대체 우리가 뭘 만들어낸 걸까요?”라며 살짝 호들갑을 떨기도 했는데요. 그런 말을 해도 괜찮을 만큼의 뛰어난 프로세서, 그 프로세서의 성능을 잘 끌어내는 맥북 프로를 만들어 냈다고 인정할 만합니다.

◇맥북 프로, 강력한 동영상 편집 기능으로 틱톡 세대는 물론 영상에 민감한 모든 세대에 어필

이번 M1 프로와 M1 맥스 프로세서의 등장으로 애플의 ‘두 가지 전략’을 알 것 같았습니다.

첫번째는 애플의 주력제품인 아이폰과 맥북 시리즈가 ‘사진·영상과 관련된 전방위적 소비자 체험의 향상’에 올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달 발표된 아이폰 13 에는 성능이 크게 향상된 ‘A15 바이오닉’ 프로세서가 탑재됐는데요. 애플이 이 강력한 프로세서를 활용해 ‘틱톡’에 남보다 더 멋진 동영상을 올리고 싶은 MZ세대 욕구를 자극하면서, 한편으로 고품질 영상을 갈망하는 계층, 즉 나이 불문하고 영화 같은 영상을 찍고 싶어하는 계층(여기엔 저도 포함되는군요)의 욕망을 동시에 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애플이 새로 발표한 맥북 프로의 전략에 곧바로 연결됩니다. 아이폰 13을 통해 더 나은 동영상 촬영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면, 상당수는 이를 편집하는 것에도 관심을 더 갖게 되겠지요. 하지만 4K(800만 화소, 풀HD의 4배) 이상의 고품질 영상을 다양한 기법을 구사해 빠르고 자유롭게 편집하려면 꽤 높은 컴퓨팅 파워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애플은 전문적인 영상 편집을 노트북에서 하고 싶은 프로들, 프로는 아니지만 영상을 더 제대로 다루고 싶어하는 유튜버·인플루언서 그리고 그 후보군을 향해, 영상을 즐기는 것은 물론 제작·편집에서도 탁월한 성능을 발휘하는 노트북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겠지요.

이것은 애플 제품 전체의 판매를 끌어올리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당장 고품질 영상을 찍고 싶은 사람, 지금은 아니더라도 곧 그런 영상을 찍어보고 싶은 많은 이들은 아이폰 13과 맥북 프로를 ‘영상 제작(아이폰)과 편집(맥북 프로)을 위해 필요한 한 세트의 창작도구’로 여기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폰 판매는 물론, 맥북 프로 판매도 더 늘어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아이폰과 맥북 프로, 그리고 촬영·편집에 필요한 각종 애플 소프트웨어 등이 한데 어우러져 사용자들에게 더 큰 매력을 선사한다면, 애플 생태계가 영상이라는 하나의 큰 축을 중심으로 한차례 더 확장될 수도 있겠지요.

지난 18일 애플 행사에서 진행자가 신형 맥북 프로를 설명하고 있다. 14인치와 16인치 디스플레이 모델이 제공된다. /애플 동영상 캡처

◇신형 맥북 프로 프로세서에서 애플 반도체 개발의 로드맵 추정 가능

두번째로 알 수 있는 전략은 ‘애플의 프로세서 개발 로드맵’입니다. 신형 맥북 프로에 탑재된 ‘M1 프로’와 ‘M1 맥스’를 통해 대강의 그림을 알 수 있게 됐습니다.

두 프로세서는 작년에 발표돼 맥북 에어와 아이패드 프로 등에 들어갔던 ‘M1′ 프로세서를 기본으로 하되, 연산처리 성능을 큰 폭으로 높였습니다.

애플은 맥북 등에 기존에는 인텔 칩을 썼었지요. 이를 버리고 작년 발표된 맥북 에어에 자체 개발의 M1 칩을 넣었던 것인데, 기대 이상으로 평이 좋았습니다. 핵심 반도체 내재화를 통해 원가를 절감하고, 제품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사용자들이 이를 좋아했습니다. 애플의 장기인 자사 OS, 제품·소프트웨어와 통합된 프로세서 최적화를 통해 뛰어난 성능을 과시했죠.

하지만 당시에도 회의적인 시각이 꽤 존재했었습니다. M1이 맥북 에어에서 탁월한 성능을 나타낸 것은 ‘단위 전력 대비 퍼포먼스’라는 한정된 영역 내에서의 이야기이고, 고성능 컴퓨팅의 세계를 아우르는 전체 스펙트럼에서 애플 설계의 프로세서가 어느 정도의 확장성(scalability)을 가질 수 있겠느냐는 의심이었죠.

참고로 M1 프로세서는 세계최고 파운드리(반도체수탁제조업체)인 대만 TSMC에서 최첨단인 5나노 제조 프로세스를 통해 양산한 칩(정확히는 시스템온칩·SoC)입니다. 이 덕분에 칩당 160억개라는 극단적으로 많은 트랜지스터의 집적이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빨리 최신 제조 프로세스를 이용해 설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장점인 동시에 한계일 수도 있지요. 다음 단계에서 비약적인 성능 향상을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얘기이니까요. 따라서 M1 칩에서 크게 발전하려면, 2022년 이후의 3 나노 공정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즉 애플이 TSMC의 5나노 공정 혜택을 가장 빨리 입어, 유수의 팹리스(반도체설계전문업체)들을 제치고 프로세서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줬지만, 곧 5나노 공정의 프로세서 제조가 라이벌들에게도 일반화된다면, 애플의 비교우위가 사라질 수 있다는 추정도 가능했죠.

따라서 애플이 3나노 공정의 프로세서를 내놓기 이전인 올해 연말 시점에서, 신형 맥북 프로에 들어가는 자체 프로세서의 성능이 어느정도 나와줄지가 ‘애플 실리콘’의 진정한 실력을 검증할 기회라는 관측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신형 프로세서 M1 프로와 M1 맥스는 그런 회의적인 시각을 한 방에 날려줄 만큼의 실력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름 자체가 M2가 아니라 기존 M1의 파생제품 느낌을 주는 M1 프로와 M1 맥스인데요. 여기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무어의 법칙(인텔 공동창업자 고든 무어가 1965년 ‘칩의 트랜지스터 집적도는 24개월마다 2배씩 증가한다’고 주장한 이론)’이 일시적인 한계, 즉 (회로의 선폭을 물리적으로 더 줄이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단위 면적 당 집적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 수의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는 다른 수단이 총동원됐다는 것입니다. 앞서 설명드린대로, 단위 면적 당 트랜지스터 수를 크게 더 늘리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죠. 다시 말해 TSMC의 제조기술을 통해 상대적으로 쉽게 가는 방법을 쓰기 어려워진 겁니다.

그래서 애플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더군요. 우선 칩의 면적을 훨씬 넓혔습니다. 단위 면적에 트랜지스터를 더 쌓을 수 없으니, 면적을 넓힌 겁니다. 어찌보면 좀 황당한 방법이지만, ‘단위 면적’이 아니라 기존보다 훨씬 넓어진 다이 즉 ‘전체 면적’의 트랜지스터 수를 크게 늘렸습니다. 덕분에 M1 프로에 집적된 트랜지스터 수는 M1의 2배인 337억 개이고요. M1 프로의 고성능 버전인 M1 맥스는 트랜지스터 수가 M1 대비 3.5배인 570억 개입니다. 애플은 M1 맥스가 자신들이 만든 칩 가운데 역대 최대 사이즈라고 자랑하고 있는데요. 이게 자랑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얘기이니까요. 단위 면적 당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쌓지 못했기 때문에, 다이 면적이 역대 최대가 된 것이겠죠.

아무튼 이렇게라도 트랜지스터 수를 크게 늘린 것은, 모든 것을 본인들이 다 설계해서 제품의 전체 최적화에 능한 애플이기에 가능한 얘기일텐데요. 모든 면에서 최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 지금 단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택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리고 CPU(중앙처리장치)·GPU(그래픽처리장치)의 코어, 메모리의 대역폭을 크게 늘려 전체 성능을 끌어올렸습니다. 특히 최근 프로세서 제조기술의 트렌드는 칩들 간의 거리를 줄이고, 칩의 배치를 최적화하고, 통신을 더 효율적으로 하도록 만들어, CPU 성능의 큰 향상 없이도 시스템 전체 성능의 비약적 향상을 도모하는 것인데요. 애플의 신형 프로세서 M1 프로·맥스가 바로 그 사례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M1에서 파생된 제품이고, M1과 설계 구조의 차이는 없습니다. 나쁘게 보면 ‘CPU의 비약적 향상이 어려우니 다른 재주로 커버하는구나’라고 볼 수도 있고, 좋게 보면 ‘CPU 의 큰 향상 없이도 성능을 이렇게 올리다니, 향후에 CPU가 바뀐다면 프로세서의 전체 성능이 어디까지 올라갈까”라고 기대할 수도 있겠죠. 앞으로 미세화 공정이나 다른 첨단 패키징 공정이 더 발전되면, 애플 프로세서의 설계 철학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프로세서 이름도 M1의 파생형이 아니라, M2, M3 같은 다른 이름으로 바뀌게 되겠지요.

M1 프로·맥스도 이렇게 뛰어난데, 미래의 M2, M3 프로세서는 어떤 성능을 보여주게 될까요? 그리고 그렇게 향상된 성능의 프로세서를 탑재한 제품들은 어떤 새로운 기능·서비스를 보여주게 될까요? 아마도 애플의 향후 M 시리즈 어디쯤에서는 애플 버전의 스마트카, 혹은 자율주행차용 칩이 나오게 될 겁니다. 애플이 작년에 M1을 처음 발표하고, 이제 겨우 그 프로세서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나온 정도인데요. 지금 나온 프로세서의 성능이 이 정도라면, 앞으로 고도의 자율주행에 대응하는 차량용 프로세서의 개발도 점쳐 볼 수 있겠지요.

사실 소비자들이 제품 내부에 탑재된 프로세서의 세세한 내용까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 애플의 재주라고도 할 수 있을테고요. 현재 애플의 거의 모든 경쟁자들이 애플의 반도체 내재화 전략을 따라가고 있으니, 그만큼 미래를 내다보는 그들의 장기적인 전략에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애플은 지난 18일 이벤트에서 신형 프로세서 M1 프로(사진)와 M1 맥스가 탑재된 맥북 프로 모델을 선보였다. /애플 동영상 캡처

◇애플 실리콘 전략에서 진짜 따라하기 어려운 것은 내용이 아니라 장기적 관점과 실행력

그럼 애플의 전략은 알았으니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요? 이 부분이 어려운 것이죠. 이제는 모두가 다 압니다. 하지만 알아도 따라가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품의 겉에 보이는 요소라면 금새 베낄 수 있겠죠. 하지만 쉽게 베낄 수가 없는 겁니다. 이 전략은 오래 전부터 시작된 장기적인 사고의 연장선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전략의 ‘내용’이 아니라, ‘장기적인 사고’를 통해 ‘일관성’을 갖고 오랜기간 제대로 밀어붙이는 것 자체가 경쟁력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제품·서비스의 모든 것을 아주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당장의 부분 최적화가 아니라 미래를 내다본 전체 최적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프로세서나 제품·기능·서비스는 지금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제품이 나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기획된 것이고, 기획되기 이전 단계에서의 더 큰 제품 전략과 철학이 담겨 있는 것이죠.

하나의 예로, 지난달 출시된 아이폰 13 카메라의 개발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생각해 보죠.

애플에 따르면, 아이폰 13 카메라의 제품 기획은 3년 전 시작됐습니다. 왜 그 때인가 하면, 3년 전이 실제로 아이폰 13에 탑재될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사양을 확정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즉 아이폰 제품 기획의 모든 것은 ‘프로세서’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카메라 이미지 센서 스펙도 그 시점에 결정됐고, (아이폰 13에 처음 장착된) A15 바이오닉 프로세서의 사양도 이때 확정됐습니다. 애플은 이미 3년 전 단계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체험을 ‘예측’하거나 혹은 소비자에게 어떤 경험을 제공할 것인가를 주도적으로 결정해야만 했던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800명 정도의 카메라 하드웨어팀과 소프트웨어팀이 함께 일하면서 3년 뒤 내놓을 아이폰 카메라에서 어떤 소비자 경험을 만들어낼지 준비해 나갔던 겁니다. 애플의 카메라 성능 개선을 위한 노력도 이정도인데, 애플 프로세서의 자체 개발이 얼마나 장기적 관점에서 이뤄지고 있을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장기적 관점의 제품 계획은 일류 기업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입니다. 이런 기업의 특징은 초기에 계획을 세우는 것에 매우 공을 들이고, 한번 세워진 계획은 근간을 잘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때그때의 대응은 빠르게 해야겠지만, 이런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갑자기 발생하는 일이나 낭비의 대부분은 계획을 잘 세우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거나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많은 문제점이나 낭비요인은 애초에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않아서 생깁니다. 조직의 일이 늦어지고 잘 안풀리는 것의 대부분은 결정권자가 판단을 미루거나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요. 결정권자가 이것만 제대로 해준다면, 대개의 경우 일은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조직원, 아니 인간은 목표가 분명하게 주어지고, 또 그 목표를 이루는 것에 가치를 느낄 수 있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 예상되면, 하지 말라고 해도 알아서 최선을 다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지금 당장 무엇을 바꿔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10년 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이를 제대로 실행해나갈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플랫폼 기업들마다 자체 프로세서 개발에 나서고 있고, 반도체·IT·자동차 산업이 일대 전환기에 놓여 있지만, 이런 시기일수록 좀더 멀리 보면서 장기적으로 어떻게 투자하고, 어떻게 경영계획을 짤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이제 눈앞의 것을 갑자기 바꿔서 급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기적인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또하나의 사례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영국 자동차회사들은 왜 전부 망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국은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과 함께 세계 자동차산업을 주도했지요. 하지만 영국 국적 양산차 회사는 이제 다 사라졌습니다. 재규어–랜드로버는 인도 타타자동차에, 롤스로이스와 미니는 독일 BMW에, 벤틀리는 독일 폭스바겐에, 로버는 혼다와 BMW를 거쳐 지금은 중국 상하이자동차에 흡수됐지요.

영국 자동차회사 몰락의 이유에 대해선 의견이 다양하지만, 6~7년 전 런던에서 만났던 한 영국 자동차 업계의 베테랑 엔지니어 얘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에게 “영국 자동차회사가 왜 다들 망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한 가지로 얘기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물론”이라면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20~30년 전 영국 자동차회사에는 오직 1년짜리 계획만 있었다. 당장 올해만 생각했기 때문에 미래를 계획할 수 없었고, 결국 20~30년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회사에 맞설 수가 없게 됐다. 내가 보는 이유는 이 한 가지다. 1년짜리 계획, 영국 자동차회사에는 그 이상이 없었다.”

어떻습니까. ‘애플 실리콘’의 전략을 바라보면서 공포를 느끼는 것은 전략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동안 해온 일들, 오래 전부터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대로 실행해 온 장기적 관점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물어봐야겠죠. 얼마나 장기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지, 5년전, 10년 전에 우리에게 장기적 계획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것을 중간에 뒤엎는 일을 반복하지 않고 꾸준히 발전시켜 왔는지에 대해서요. 상대 전략의 내용을 논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런 장기적 관점의 사고를 할 수 있는 리더가 있는지, 혹은 그런 조직 환경이 마련돼 있는지부터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10년은 고사하고 1년짜리 계획도 없는 것은 아닌지, 지난달 세운 계획을 이번달에, 어제 세운 계획을 오늘, 아침에 세운 계획을 저녁에 뒤엎고 있지 않은지, 중간급이나 고위 리더가 바뀌면 ‘다시 처음부터’는 아닌지, 몇 년 전 다른 팀에서 하다가 안됐던 일을 그대로 가져와 하면서, 이전 팀에서 어떤 시행착오·문제점이 있었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면서 다들 바쁘게 일하고 있으니 됐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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