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극장가, 차분하게 소소하게..여운은 길게

백승찬 기자 입력 2021. 9. 17. 19:09 수정 2021. 9. 17.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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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껏 골라 보자, 영화

[경향신문]

(왼쪽부터) 영화 <기적>, 영화 <아임 유어 맨>, 영화 <토베 얀손>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여름 극장가는 선방했다. <모가디슈> <씽크홀> <인질>이 각 300만, 200만, 100만 관객을 넘겼다. 지난 1일 개봉한 마블 영화 <샹치: 텐 링즈의 전설>도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상영 중이다. 뒤를 이은 추석 극장가는 어떨까. 작품들의 분위기는 차분하다. 스타 캐스팅을 자랑하는 대작은 없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도 없다. 영화 규모는 작지만 담고 있는 정서는 작지 않은 영화들이 추석 관객을 기다린다.

■80년대 감동실화 vs 현실의 범죄소탕극

<기적>(감독 이장훈)은 1988년 경북 봉화군에 세워진 최초의 민자역사 양원역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다. 교통사정이 여의치 않자 주민들이 직접 대합실, 승강장을 만들고 역명까지 지은 곳이다. 마을 주민을 위해 어떻게든 역을 만들려 하는 고등학생 준경(박정민)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 영화에 악인은 나오지 않는다. 시골 마을의 밝고 따뜻한 정서가 영화를 지배한다. 다만 등장인물들은 상처, 후회, 죄책감을 가슴 한편에 짊어진 채 밝은 표정으로 살아간다. 다양한 방식으로 1980년대를 재현했다. 학생들은 칙칙한 교복 대신 원색의 사복을 입었다. 카세트테이프, 문방구 앞 올림픽 오락기, 폴라로이드 사진, 지도책, 비디오테이프 등 향수 어린 물건이 등장한다. 박정민, 임윤아, 이성민, 이수경 등 배우들의 경북 북부 사투리도 그럴싸하다. 12세 관람가.

영화 <보이스>의 한 장면 | CJENM 제공

<보이스>(감독 김곡·김선)는 보이스피싱 범죄를 소재로 한 스릴러다. 부산 건설현장 직원들을 상대로 보이스피싱 전화가 걸려오고, 수많은 사람이 딸의 병원비, 아파트 중도금 등 소중한 돈을 잃는다. 현장 작업반장인 전직 형사 서준(변요한)은 가족과 동료의 돈 30억원을 되찾기 위해 중국의 콜센터에 잠입한다. 서준은 거대한 보이스피싱 조직의 총책 곽프로(김무열)와 대면한다. 목소리 너머에 존재했던 보이스피싱 조직의 범죄현장이 시각적으로 구현된다. 4인 1조 조직원들이 대본에 따라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형사, 은행 직원, 금융감독원 직원을 연기하며 돈을 뜯는다. 제작진은 실제 보이스피싱 집단이 사용한 대본 유출본을 구해 영화에 적용했고, 알려지지 않은 부분은 상상으로 구현했다. 김곡 감독은 “범죄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 범죄에 맞서는 영화이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15세 관람가.

■다양한 시선의 외화들

<아임 유어 맨>에는 사용자의 취향에 맞게 설계된 휴머노이드 로봇 톰(댄 스티븐스)이 등장한다. 고고학자 알마(마렌 에거트)는 3주간 톰을 테스트하는 실험에 참가한다. 알마는 사랑에 냉담하고 인간관계에 지친 상태다. 톰은 거실을 완벽하게 정리하고 정갈한 아침 식사를 만들고 영국 악센트를 써서 알마의 이국 취향까지 만족시키지만, 알마는 어딘지 톰이 불편하다. 알마는 몇 가지 사건을 계기로 톰과 가까워지지만, ‘완벽한 파트너’ 역할을 할 수 있는 인공지능(AI)에 연애 감정을 느껴도 되는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AI에 말하는 건 독백 아닌지, AI의 위로는 감정을 흉내내는 것 아닌지, AI 파트너와 행복하다는 건 중독 아닌지 의심한다. <파니 핑크>(1994)의 주연이자 넷플릭스 시리즈 <그리고 베를린에서>(2020)를 연출했던 마리아 슈라더가 연출·공동각본을 맡은 영화다. AI가 인간에게 행복을 주더라도, 그 행복이 ‘진짜 행복’인지 묻는다. 주연 에거트는 올해 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 주연상을 받았다. 젠더프리로 시상했기에 유일한 주연상 시상자였다. 15세 관람가.

<토베 얀손>은 세계적인 인기 캐릭터 무민을 창조한 핀란드 작가 토베 얀손의 삶을 그린 전기 영화다. 화가였던 얀손은 우연히 그린 무민 캐릭터로 조금씩 인기를 얻는다. 사회주의 언론사 사주인 남성 아토스, 헬싱키시장의 딸이자 연극연출가인 여성 비비카와 결혼제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랑을 나눈다. 무민 캐릭터는 기대하기 힘들었던 성공을 안겨주지만, 얀손은 인간적 갈등으로 고뇌한다. 지난달 열린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다. 연출(자이다 베리로트), 각본(에바 푸트로), 촬영(린다 베스베르그), 프로듀서(안드레아 로이터) 등 주요 제작진이 여성으로 구성됐다. 어린이용 그림책으로 사랑받는 무민에 얀손의 고뇌와 갈망이 담겨있음을 보여준다. 15세 관람가.

영화 <공작조>의 한 장면 | 조이앤씨네마 제공

<공작조: 현애지상>은 과거 중국 영화의 얼굴이었던 장이머우 감독의 스파이 스릴러다. 일본이 만주국을 세워 중국 침략 야욕을 불태웠던 1931년이 배경이다. 소련에서 훈련받고 돌아온 4명의 공산당 스파이는 괴뢰국 경찰에 붙잡혔다가 탈출한 동지를 국외로 내보내는 임무를 맡는다. 스파이들은 변절한 동지가 유출한 정보로 인해 위험에 빠진다. 항일 첩보전을 다룬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 <암살> <밀정>과 유사하지만, 웃음기는 거의 거둔 채 첩보전 자체에 집중한다. 고문에 못 이긴 배신자가 나오고, 적진 속의 내통자가 드러난다.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도 등 뒤엔 총을 숨긴 스파이들이 활약한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 영령’을 기린다는 점에서 최근 중국 문화 콘텐츠의 애국주의적 자장에 놓여 있으나. 스파이 스릴러로만 봐도 근사하다. 15세 관람가.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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