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팬데믹 시대 종교의 빈자리

입력 2021. 9. 24.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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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코로나19 팬데믹이 2년째 이어지면서 종교의 자리가 위협받고 있다. 본격적인 국내 확산이 신천지로부터 시작되기도 했고, 개신교를 비롯한 종교 집단의 ‘현장 예배’와 ‘밀접 접촉’이 줄곧 방역 당국과 언론의 걱정거리였던 탓일 테다. 전통적으로 종교를 설명하던 대면·집합·밀집과 충돌하는 낯선 시대가 찾아왔다. 코로나 상황이 반영된 지난 4월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종교인구는 7년 전에 비해 10% 포인트나 줄어든 40%로 나타났고, 더구나 종교가 없다는 사람 중 절반 넘게(54%) 그 이유를 “관심이 없어서”라고 답했다. 이제 종교를 향한 대중의 태도는 비판과 비난을 넘어 아예 관심까지 거두고 있다.

이런 때 종교의 시선이 자기 집단과 관성적인 내부 문화에만 머무른다면 그 자리는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젠 피할 수 없는 온라인 환경에 대한 종교 집단의 적응 속도나 종교 활동에서 온라인 자체가 지닌 한계를 생각하면 그렇다. ‘위드 코로나’로 전환한다 해도 과연 신도들이 예전과 똑같은 형태의 소속감과 충성도로 돌아올지도 불분명하다.

그런데 그 시선을 사회 속 종교의 역할로 돌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팬데믹에서 종교가 채워야 할 자리는 여전히 빈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재난을 겪는 우리 사회에서 공감과 위로, 현실의 의미 해석, 대안 제시의 자리는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모두 종교사회학자들이 종교가 담당할 몫이라고 규정한 덕목이다. 종교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합의인 셈이다.

코로나로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우리의 위로는 충분치 않다. 감염환자와 사망자의 삶은 통계수치로만 취급돼서는 안 되고, 사력을 다하는 의료진과 소방·검역 인력에 대한 격려와 돌봄도 부족하다. 취업난에 더해 코로나 블루라는 정서적 아픔까지 겪는 청년들을 향한 공감은 공허하다. 붕괴된 일상으로 생존까지 위협받는 계층의 호소에는 귀를 더 기울여야 한다. 재난 상황에서 사회적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는 건 종교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핵심이다.

재난의 의미를 해석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종교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종교는 현재의 고통을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역사성으로 설명하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영감의 원천이 돼야 한다. 팬데믹을 초래한 근원을 추적해 돈과 효율성, 경쟁을 숭배하는 세상을 향해 예언자의 소리로 경고하고, 절대 돈으로 치환할 수 없는 사람의 가치와 정신적·영적 영역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게 지금 종교가 마땅히 할 일이다.

종교다움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궁극성(ultimacy)’이 있다. 종교의 궁극성이란 개인과 사회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근원적 질문에 본질적이고 최종적인 차원에서 답하는 것을 말한다. 깊이 있는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현실의 난제를 긴 호흡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세와 초자연에만 기대는 게 아니다. 현실의 치열함에 두 발을 단단히 디딘 채 시대 질서와 구별되는 가치와 기준을 삶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눈앞의 손익 계산에만 몰두하는 현대사회에서 유불리를 뛰어넘는 사랑과 자비의 언어로 현실을 재해석하고, 나아가 이 땅에 실현할 더 나은 삶의 모델에 대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사회제도는 많지 않다. 결국 종교는 세상 질서와 차별적인 궁극성을 잃지 않을 때 사회적 필요에 부응할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의 비판과 무관심은 세속과 별반 다르지 않게 돼버린 기성 종교에 대한 실망과 포기의 다른 이름이다. 이제 종교는 그 시선을 사회로 돌려야 한다. 팬데믹 시대가 일깨운 사회 속 종교의 빈자리를 찾아서 채워 넣을 때다. 종교가 제 몫을 다하지 못했을 때 문학, 예술, 미디어·대중문화, 시민종교 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는 서구의 경험을 허투루 듣지 말아야 한다.

박진규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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