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세대는 실패했다, 청년에게 자리라도 내주자"

김종철 2021. 11. 1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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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김종철의 여기][한겨레S] 김종철의 여기 _ 암 투병 중인 정책가 정태인
폐암 4기 투병 중 반성·호소..참여정부에서 일했던 과거 자성
"지식인 대부분 기득권, 세상 바꿀 힘 잃어..청년 절망 깨달아야"
“여태까지는 상태가 괜찮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죠.” 폐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정태인 전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장이 지난 3일 요양 중인 충북 괴산 자연드림파크에서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괴산/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이 수액 한통을 맞는 데 1시간 반 정도가 걸려요. 치료 끝날 때까지 기다려줘요.”

팔에 주사기를 달고 나타난 정태인(61)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이하 호칭 생략)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얼굴도 말끔해 겉모습으로는 폐암 4기의 중환자라는 것을 알기 어려웠다. 머리를 감싼 비니 모자만이 머리카락이 빠지는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듯했다.

그는 지난 7월 초 연구실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동료들의 심폐소생술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나, 진단 결과 폐암이 뇌와 척추뼈에도 전이된 것으로 확인됐다. 통계적인 잔존 수명은 6개월이었다. 다급한 뇌종양만 수술로 제거하고, 나머지 부분은 수술이 불가능해 항암 치료만 하기로 했다. 암세포를 제거하는 세포독성 항암 치료는 두번에 끝내고, 지금은 면역 강화 치료를 하고 있다. 서울의 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뒤 충북 괴산으로 옮겨 대체 치료 등을 하며 요양하고 있다. 지난 3일 오후 군자산 아래에 있는 괴산 자연드림파크의 치유센터에서 정태인을 만났다.

우리 불평등은 프랑스혁명 때보다 심해

―많이 놀랐겠어요.

“의식이 돌아온 뒤 폐암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올 것이 왔다’라는 생각만 들었어요. 담배를 많이 피웠고, 몸을 전혀 돌보지 않았잖아요. 현재까지는 다행히 치료 결과가 좋아요. 폐의 암 덩어리 두개 중 하나는 없어졌고, 뼈암도 여태까지는 통증이 없어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아직은 좋아요. 담배 안 하고 술도 입에 안 대지, 끼니는 꼬박꼬박 챙겨 먹고 운동하니까 건강 상태는 20대 이후 지금이 가장 좋아요.(웃음)”

―항암 치료는 언제까지 해야 해요?

“면역 주사는 원하면 더 맞을 수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보험 적용이 안 돼 너무 비싸요. 여태까지는 도와주시는 분들도 있고 해서 치료를 받았는데, 계속은 못 하죠. 오는 16일 여섯번째 치료를 받으면 그걸로 끝내려고 해요.”

정태인은 폐암 진단을 받은 뒤에도 늘 해오던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그의 관심 주제인 불평등과 기후위기, 미-중 마찰에 관한 외국 논문들을 매일 한두편씩 읽은 뒤에 단상들을 페이스북에 기록하고 있다. 투병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예전에는 동료들과 ‘함께 공부’였으나 지금은 ‘나홀로 공부’다.

―보통은 건강이 나빠지면 세상과 단절하고 치료에만 전념하는데, 그러질 않고 있네요?

“치료할 게 없잖아요, 전혀. 물론 평상시와 똑같지는 않아요. 사람 만나는 거나 모임이 없어졌거든요. 덕분에 글 읽는 시간은 더 많아졌겠죠. 무리하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처음에는 읽기만 했는데, 의사들은 뇌도 사용하라면서 글쓰기도 권해요. 슬그머니 욕심이 생겨서 슬슬 글을 쓸까 생각하고 있어요.”

―불평등과 기후위기, 미-중 마찰은 하나만 파고들어도 어려운 주제인데 어떻게 셋을 동시에 공부해요?

“뭐,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다 공부해서 대안을 내야죠.(웃음) 불평등은 오래전부터 들여다봐왔고, 외교·안보 쪽은 2017년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하면서 시작했죠. 그동안 외교·안보 분야를 잘 몰라서 고민이었거든요. 기후위기 등 생태 문제도 우리나라에서 이슈가 되기 전부터 관심을 가졌고요.”

―셋 다 우리 삶에 중요한 문제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진 것은 불평등 문제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 베타값(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개발한 지수. 한 나라의 전체 자산 가치를 국민소득으로 나눈 값. 높을수록 자본에 비해 노동 몫이 줄어드는 것을 뜻함)이 현재 9에 가까운데, 프랑스혁명기였던 레미제라블 시대가 7.5였어요. 지금 우리의 불평등이 더 심하다는 얘기죠. 이 정도의 불평등이면 옛날 같으면 혁명이 일어나요. 사람들이 지금 참는 것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사회 자체가 붕괴하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아이를 안 낳아버리니까 사회가 붕괴되는 거죠. 그런 심리가 청년들한테 있어요. 기후위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주변의 젊은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다 죽으니까 괜찮아요. 잘사는 놈들도 다 같이 죽게 되잖아요’라고 해요.”

―불평등이나 기후위기 문제는 이른바 진보 정권에서도 추세가 안 바뀌고 있어요.

“그게 제가 반성하는 건데요. 우리가 데모하고 할 때는 진짜 목숨 걸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 아이들이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랬던 거거든요. 그런데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나빠졌어요. 상위 10%가 아니면 더 절망적인 사회가 됐어요. 저도 세상을 이렇게 만든 한 축이죠. 저 역시 참여정부(노무현 정부)에 들어가서 청와대에 있었으니까요. 탄소 배출과 불평등의 두 그래프를 보면 나빠지는 상태가 민주 정부든 보수 정부든 거의 직선으로 똑같아요. 완전히 실패했다는 얘기죠.”

정태인 전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장이 지난 3일 오후 <한겨레>와 인터뷰 도중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괴산/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국민의힘보다 낫다고 버티면

―불평등 해소는 진보의 과제이자 덕목인데, 왜 실패했을까요?

“두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관료들에게 끌려가는 문제예요. 노무현 정부 때는 관료들하고 다투기라도 했지만, 문재인 정부의 경우에는 대통령이 개입을 안 하니까 그냥 관료들한테 주도권이 넘어가 있는 상태죠. 관료는 ‘비즈니스 애즈 유주얼’(business as usual), 즉 쭉 해오던 대로만 하거든요. 두번째는 진보적 지식인이 상위 계층에 속하게 된 점입니다. 웬만한 지식인은 다 상위 10%에 들어가 있어요. 우리나라 중위소득이 1인 연소득 2천만원 정도이고, 5천만원이 넘으면 10~20%에 속하죠. 지식인들은 자기는 물질적 조건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지식인들이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중위소득보다 조금 못 받아야 되거든요. 보세요. 이제 진보 지식인들도 자기 재산이나 아이 문제가 건드려지는 것은 원하지 않아요. 조국 사태 때 그런 것이 확실히 나타났죠. 자식 스펙 쌓기 등은 분명히 특혜이고 불평등인데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잖아요. 거기다가 아이가 논문을 썼다느니 하고, 의대 교수라는 사람도 ‘아이가 논문을 쓸 만한 자격이 있다’는 등의 명백한 거짓말을 서로 하는 것을 보고는 지식인들이 지배계급에 들어갔구나 하는 것을 알았어요. 뭐, 이른바 민주화 세대라고 했던 우리 세대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봐야죠. 머리로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회를 진짜로 바꿀 수는 없어요. 앞으로 오히려 보수 쪽을 강화하는 작용을 할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도 민주화를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던 세대는 지금 자신들이 대안을 못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국민의힘보다는 자기들이 낫거든요. 분명히 낫긴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똑같이 불평등을 악화시켰죠. 남북 관계는 양쪽이 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떤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집단이 아니에요, 지금은.”

―얘기를 들으면서 두가지가 궁금해집니다. 하나는 대부분의 진보 지식인들이 이미 기득권화돼서 대안을 만들 위치에 있지 않다면 누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건가 하는 거고요, 다른 하나는 이른바 586 지식인들이 대부분 소득 상위 10%에 든 것은 한국 자본주의가 발전한 데 따른 것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두번째부터 얘기하면 엘리트가 보상을 받은 거라고 볼 수도 있죠. 그러나 자신이 있는 곳이 위쪽이니까 아래쪽을 반영하는 정책을 내놓기가 힘들죠. 물론 좌파라는 건 기본적으로 그런 정책을 만들기는 하지만, 실행할 능력은 없어졌어요. 저는 아직도 청와대나 국회에서 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지만, 그런 게 안 되면 다른 운동을 조직하든가 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그럴 의지가 없거든요. 자기가 있는 데서 뭔가 기여할 바를 찾지, 자신의 삶을 확 바꿔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안 하게 된 거죠. 늙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확실히 기득권이 된 거죠. 그걸 확실히 느낀 계기가 있었어요. 제가 몇년 전에 저희 또래 교수들보고 교원연금 받을 때가 지났으면 다 그만둬라고 했는데, 박진도 교수(충남대) 한명 빼고는 아무도 안 하더라고요. ‘내가 정당하게 보상을 받은 거니까 버릴 수 없다’는 뜻이죠. 그런 식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죠. 강남의 부자들도 다 자기가 정당하게 머리 굴려서 재산 모았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정태인은 수십년 동안 언론에 써오던 칼럼을 지난해 말 관뒀다.

“<경향신문>과 <시사인>에 칼럼 쓰던 거를 지난해에 자발적으로 그만뒀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에요. 교수 자리 등 딴것을 가졌다면 더 폼나게 버렸을 텐데, 제가 가진 게 그것밖에 없었어요.(웃음) 젊은 사람들에게 쓸 기회나마 내줘야죠.”

“이재명 후보 개혁적 면모 있으나…”

정태인 전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장은 학자나 대학교수보다는 현장의 정책가를 지향했다. 고 박현채 선생처럼 “민중에게 필요한 것은 공부해서 무엇이라도 쓴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폐암 4기 진단을 받고 난 뒤에도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기후위기, 동아시아의 평화에 관한 책을 쓸 준비를 하고 있다. 정 전 소장이 지난 3일 오후 요양 중인 충북 괴산 자연드림파크에서 벤치에 앉아 태블릿피시로 논문을 읽고 있다. 괴산/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민주화 세대는 왜 이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때는 석사학위만 갖고도 교수가 됐어요. 빠른 사람들은 20대 후반에 됐고요. 그럼 이미 교원연금 받을 나이가 됐잖아요. 그래서 ‘니들이 왕창 그만두면 젊은 사람들이 왕창 교수가 될 수 있다’고 말했죠.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우면 분명히 새로운 생각과 대안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요즈음 40대 교수들이 과거를 넘어서는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하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좀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런 목소리가 자주 많이 나와야 돼요. 마찬가지로 지금 586세대는 자기들이 아직도 젊은 신진 세대라고 생각하지만 벌써 정치한 지가 오래된 사람은 30년 가까이 됐어요. 그러니까 정치가 딱 정체돼 있고, 젊은 사람들은 절망하는 거죠.”

―그러한 문제 해결에는 정치 리더십이 중요한데, 차기 대선주자들은 어떤가요?

“심상정 후보만 고민과 생각이 분명할 것이고, 이재명 후보도 좀 갖고 있을 거예요. 이 후보는 정책 민감도가 높고, 개혁적인 면모가 있죠. 그러나 586세대가 참모가 되고 국회를 장악하게 되면 자기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펼치지 못할 겁니다. 또, 관료를 장악하지 못해도 여태까지 민주당이 해왔던 대로가 되고 말 거고요. 그걸 막으려면 우호적인 정치세력, 예를 들어 정의당이라든가 시민사회 쪽, 특히 생태운동 쪽 사람들을 가까이해야 돼요.”

전문연구자로서 정태인은 독특하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석사학위를 했으나 박사는 과정만 마쳤다. 결국 박사학위는 지난해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땄다. 몇군데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잠깐 했을 뿐 한번도 대학에 적을 두지는 않았다. 대신 한국사회과학연구소(한사연)와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새사연),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등 독립적인 민간연구단체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에서 국민경제비서관 등을 잠깐 한 것 외에는 공직도 맡지 않았다.

―페이스북 자기소개란에 ‘독립연구자’라고 적혀 있던데요.

“교수도 아니고, 어디 소속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외국에서는 그런 독립연구자가 흔해요.”

―평생을 그렇게 사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제 처가 돈을 안 벌었으면 그렇게 못 했죠. 잘난 척하는 사람들은 대개 저처럼 마누라 고생시킨 사람들이에요.(웃음) 1인 자영업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살기가 굉장히 힘들지만, 안정적인 교수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여러 새로운 것을 생각할 수는 있겠죠.”

정태인의 부인 차정인씨는 화가로, 그림책 등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이나 시도는 안 했어요?

“교수를 하고 싶다거나 부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번도 없어요. 무슨 학문을 한다는 생각을 별로 안 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중요한 문제는 제가 다 건드리고 있으니까 그것만도 바쁘잖아요. 노후가 되니까 걱정이 좀 되긴 하더라고요.(웃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새사연)의 연구실에서 논문과 책으로 둘러싸인 책상에 앉아 있는 정태인 당시 새사연 원장. 이수민씨 제공

아버지가 공무원인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정태인은 중학생 때부터 경제학자를 꿈꿨다. “중2 때 선생님이 똑똑한 사람들은 경제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한 말이 뇌리에 박혀서 과학자 꿈을 버렸죠.” 고교(숭문고) 때부터 사회 비판 의식이 강했던 정태인은 1978년 대학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권에 가담했다. 1983년 “앞으로는 공부만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학위 논문보다는 한국의 정치 사회 상황을 외국에 알리는 ‘기사연 리포트’(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펴낸 한국 사회 보고서) 등 정책 보고서 작성에 더 열심이었다.

―1991년에 석사 논문을 썼으니 오래 걸렸어요.(웃음) 경제학 박사 논문은 안 썼고요.

“논문 주제가 많이 바뀌었죠. 관심사가 그때그때 바뀌었거든요.(웃음)”

―지도교수인 안병직 선생과의 갈등 때문에 못 썼다고 하던데, 맞아요?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안 샘이 한 과목의 성적을 에프(F)로 줬죠.(웃음) 그러고는 그 과목을 아예 없애버려서 보충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한사연 만들어서 왔다 갔다 하고, 박현채(1995년 작고) 선생님을 쫓아다니고 하니까 ‘정태인, 너는 이제 학자로서는 자격이 없다’는 선언을 한 거죠. 어쨌든 저 역시 교수 생활에 별 매력을 못 느꼈어요. 그래서 수업도 잘 안 들어가고 그랬겠죠. 성공회대 등에서 강사 생활을 할 때도 진짜 재미없었어요. 오히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이 훨씬 더 재미있었어요.”

―정통 학자 타입은 정말 아니군요.

“정책가죠. 저는 학문이 아니라 세상에 너무 관심이 많아요.(웃음) 박현채 선생님처럼요. ‘민중이 원하는 거는 무조건 써야 한다’가 선생님 지론이었으니까요. 선생님처럼 저도 “민중을 위해 목숨 걸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진짜 목숨이 걸려 버렸어요.(웃음)”

2017년 10월 서울시청에서 열린 제14회 칼폴라니국제학회에 참석한 정태인 당시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장이 기조발제자인 캐리 폴라니 레빗 캐나다 맥길대 명예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협동조합 제공
정태인 전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 당시 반대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는 지난 3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부작용이 예상한 것보다는 덜하지만, 양극화 심화 등 큰 틀에서는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2008년 5월13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관한 청문회’에 참석한 정태인 전 소장(맨 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책 두 권쯤 쓸 수 있기를 바랄 뿐”

정태인이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에 들어간 것은 정책가로서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그는 참여정부 첫 2년간 대통령 직속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기조실장과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내면서 종부세 도입 등 개혁에 앞장섰으나, 오래 일하지 못했다.

―행담도 개발 의혹 사건이 터져서 중도에 물러났는데요.

“말도 안 되는 의혹 사건이었지만, 그게 아니라도 하차했을 거예요. 당시 이정우, 정태인, 이동걸 셋이 청와대 안에서 표적이 됐거든요. 인수위 때 기재부(당시 재정경제부) 사람들이 그랬어요. 1년 이내에 다 쫓아낸다고 대놓고 말했으니까요. 그런데 2년을 버텼으니까 많이 있었죠.(웃음) 노 대통령이 이정우 선생님을 신뢰했기에 제가 재벌 개혁이네 뭐네 하면서 떠들고 다녀도 한동안 보호가 됐죠.”

―되돌아보면 아쉬움은 없어요?

“당시 40대로 어렸었죠. 지식도 부족했고요. 특히 동북아 구상 같은 거는 외교·안보가 기본인데 외교·안보에 대한 건 진짜 몰랐거든요. 지금 들어간다면 몇가지 정책을 더 잘할 수는 있겠죠.”

―문재인 정부 출범 때 같이 일하자는 제안은 없었어요?

“제가 노무현 정부 안에서 586 정치인들과 얼마나 척이 졌는데, 부르겠어요?”

―청와대 나온 뒤이긴 하지만, 한-미 에프티에이(FTA)에 대한 반대 깃발을 가장 세게 들었죠. 내년이면 한-미 에프티에이가 발효된 지 10년인데, 어떻게 보세요?

“반대하는 우리들이 제일 중요하게 여겼던 건 지식재산권 등 서비스 투자 분야였는데, 저희가 생각했던 것처럼 막 우르르 무너지지는 않았어요. 병원이나 학교는 돈이 안 될 것 같으니까 미국이 다행히 안 들어와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부작용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던 것은 2008년 금융위기로 미국 시장이 붕괴됐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양극화 심화라든가 서비스 분야에서 공공성의 해체 이런 거는 예상대로 확실히 관찰되고 있죠. 큰 흐름에서는 제가 틀렸다고는 생각 안 해요.”

암 투병 중인 독립연구자 정태인 전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장이 지난 3일 오후 요양 중인 충북 괴산 자연드림파크에서 태블릿피시로 논문을 읽다가 잠시 앞산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괴산/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정태인은 암 투병 이후 매일 아침 팔굽혀펴기와 복근운동, 큰절하기 등을 한다. 10회로 시작한 팔굽혀펴기는 67회까지 늘었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책 쓸 여력을 모으기 위한 안간힘일 것이다. 그는 쓰러진 직후부터 “상황이 괜찮아서 책을 두권쯤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고 희망을 피력해왔다. “불평등의 해소책, 생태 위기의 극복, 동아시아 평화 전략”을 주제로 한 첫번째 책의 제목도 <협동의 경제학2>로 벌써 정해놨다.

인터뷰 말미에 “책 쓰기 말고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습관처럼 우문을 던졌다.

“아니 별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더 하고픈 일이 없는 게 다행이죠.” 서늘한 답을 남기고 숙소로 걸어가는 정태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녹취 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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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선임기자 _ 1989년 기자로 첫발을 내디딘 뒤 정치부, 사회부 등에서 일하다 지금은 토요판 선임기자로 현장을 뛰고 있다. ‘지금 여기’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여운이 오래가는 기록’을 지향한다.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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